보험은 원래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를 대비하는 안전망이었다.
진단을 받고, 입원하거나 치료를 받으면, 가입한 보험이 경제적 손실을 덜어주는 구조. 대부분의 사람에게 보험은 ‘건강’과 ‘생명’을 보장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누군가의 말을 믿고 전세 계약을 했는데 집주인이 바뀌고, 보이스피싱으로 몇 초 만에 돈이 빠져나가고, 스마트폰 하나만으로도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세상.
이제 보험은 아프지 않아도, 병원에 가지 않아도 필요해졌다. 보험이 우리 사회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회적 방어장치’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SKT, KT 등 대형 통신사 해킹 사고는 사이버 범죄가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이제 개인정보 유출은 ‘뉴스에서 보는 일’이 아니라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위험이 되었고, 보험사 역시 그 흐름에 맞춰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사이버 보험은 아직 한국에서 대중적이지 않지만, 기업들을 중심으로 가입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이 보험은 단순한 금전 보상뿐 아니라, 데이터 복구 비용, 법률 대응, 업무 중단 손실 등 다양한 피해를 포괄적으로 보장한다.
특히 보이스피싱, 메신저피싱 같은 금융사기에 대한 보장은 개인 소비자 대상 특약으로도 확대되고 있으며, 피해 금액의 70%를 한도 내 실손 보상해주는 상품들도 등장하고 있다.
보험사들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빠르고 실질적이다. AXA, 롯데손보, 흥국화재 등은 보이스피싱 피해를 보장하는 특약을 잇달아 출시하고 있으며, 피해 보상 한도는 2천만 원에 달하기도 한다.
단순히 상품 출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조직을 편성해 리스크 분석과 대응까지 함께 운영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예를 들어 한화손해보험은 ‘사이버RM센터’를 통해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사이버 리스크 진단과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으며, 관련 보험 계약도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와 금융당국도 이에 발맞춰 AI 기반의 보이스피싱 탐지 체계 구축 등 사기 예방 정책을 강화하고 있으며, 보험사와의 협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사이버 범죄만큼이나 전세사기도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며, 보험의 역할이 부동산 계약에서까지 확대되고 있다.
특히 무자본 갭투자, 바지 집주인, 확정일자 미제공 등 복잡하고 교묘해진 전세사기 수법은 2030 청년층을 중심으로 피해를 양산하고 있다. 실제로 2025년 기준 전세사기 피해자는 2만 7천 명을 넘어서며, 그 규모와 유형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전세보증보험과 전세금 반환보증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잡고 있다. 임차인 입장에서는 집주인보다 등기부등본과 보험의 효력이 더 중요해진 셈이다.
기존에는 한국주택금융공사나 주택도시보증공사(HUG)를 통한 공공기관 중심의 보증보험이 주류였지만, 최근에는 민간 보험사들이 더 다양한 케이스를 포괄하는 상품을 앞다투어 출시 중이다.
예를 들어 SGI서울보증은 위험지역·고위험 매물에 대한 디지털 분석 기능을 탑재한 보증보험을 운영 중이고, 카카오페이손해보험은 직거래 계약이나 복잡한 다세대주택 계약까지도 보장하는 ‘전월세 안심보험’을 도입하면서 시장 저변을 넓히고 있다.
일부 상품은 전입신고·확정일자 등록 조건 없이 보장이 시작되는 간편형 플랜까지 출시되어 접근성을 크게 높이고 있다.
사이버보험, 보이스피싱 보험, 전세보증보험. 모두 실제 피해 사례가 빠르게 증가한 뒤에야 등장했고, 지금도 진화 중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리스크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보험은 이제 질병이나 사고만이 아니라, 사기와 조작, 정보의 침해로부터 삶을 지키는 장치가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볼 지점도 있다. 점점 더 많은 범죄와 사기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보험이 계속 등장하는 현실이, 반대로 우리가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보여주는 건 아닐까.
보험은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중요한 방패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방패를 꺼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더 바람직한 미래일지도 모른다.